조선시대 주택조경 배경 공간구성 사례

조선시대 주택조경 배경 공간구성 사례를 살펴보면 자연환경을 고려한 산수진경의 사상과 종교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며 공간구성은 사회신분에 따른 상류 양반계층에서 그 특성을 볼 수 있으면 아래에서 고택 위주로 그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시대 주택조경 배경 공간구성 사례
조선시대 주택조경 배경 공간구성 사례

조선시대 주택조경 배경

조선시대 정치관료기구나 사회신분제도는 양반계층의 토지사유가 인정되는 흐름 속에서 농장의 경영과 함께 주거공간 조영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태조 4년(1395년) 개경왕도에서 신분에 따라 대지의 규모가 정해져 정일품을 35부로 하여 이하 5부씩 감해서 6품은 10부 서인은 2부(대략 80평 정도)로 규제하였습니다. 이런 규제는 한양천도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예종 원년(1469) 경국대전의 ‘호전 급조가지조’에는 대지의 넓이를 축소하였고 후 조선말까지 가대분급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세종 13년에 1차 가사제한령이 공포되었고 세종 22년에는 이보다 구체적인 제한규정이 정해졌습니다. 이것은 경국대전에 기록되었고 주택조영의 기본법규로 준영이 되었습니다. ‘대전회통’의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 초기에서 말기까지 가대 및 가사의 지켜야 했던 몇 가지 제한사항 등을 살펴볼 수 있는데 주택을 구성하거나 치장하는 재료의 규제도 있었는 바 진채단청의 제한 숙석의 규제 등이 있고 숙석의 경우 주초석은 예외 한다는 문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조경 관련 6조의 하나였던 공조를 살펴보면 산택 공장 토목 영선 둔전 염장 도치 등에 관한 정사를 맡고 영조사 공치사 산택사 등의 삼속사를 두며 상림원과 심장고가 소속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상림원은 태조 3년(1394) 동산책에서 개명된 것이며 심장고는 세조 12년(1446) 장원서와 사포서로 개칭되었고 사포서는 후 성종조에 공조에서 호조로 소속이 변경되었는데 영조사는 주택 관련 업무를 맡았고 산택사와 심장고 상림원 등에서는 조경과 관련된 일을 관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조경 관련 문헌을 살펴보면 전기에 강희안의 ‘양화소록’ 이수광의 ‘지봉유설’ 박홍생의 ‘촬요신서’ 허균의 ‘한정록’ 강희맹의 ‘사시찬요초’, 중기 이후 홍만선의 ‘산림경제’ 박세당의 ‘색경’ 이중환의 ‘택리지’ 신경준의 ‘순원화훼잡설’ 이가환 이재위의 ‘물보’ 유희의 ‘물명고’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김육의 ‘유원총보’ 현문항의 ‘동문류해’ 서명응의 ‘고산신서’와 ‘본사’ 최영기의 ‘농정회요’ 등에서 조경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조선의 전통주택의 조경은 생활요구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본능적인 사고에서 출발하여 산수진경한 자연환경을 고려하고 자연계의 섭리를 승화시킨 각종 사상과 종교 등이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는 배경 요인으로 잘 표출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주택조경 공간구성

조선시대 주택조경 공간구성에 앞서 이 시대는 자연환경과 자연과 음양사상과 삼재사상 풍수지리사상 유가사상 등이 배경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습니다. 조선시대 주택은 사회신분에 따라서 평민 계층의 서민 주택 중인 계급의 중류 주택 양반 계층의 상류 주택으로 구분되는데 이에 평면 구조 외부 공간 특징이 달라지게 됩니다. 중류 및 서민 계층의 내부 공간의 특징을 포괄하며 좀 더 세분화된 상류 주택의 내부 공간은 기능에 따라 기거공간 접객공간 수장공간 작업공간 종교적 공간 등으로 구분되고 남녀 상하 계층에 따라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별당 등으로 분류됩니다. 주택의 외부 공간을 살펴보면 서민 주택은 지방에 따라 상이한 평면 형태를 보이지만 외부공간이 적게는 하나의 마당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마당은 주생활 활동을 보완해 주는 반내부공간과 같은 성격을 가지며 특별한 수식 없이 트인 공간이며 이곳에 장독대가 자리 잡고 장독대는 하나의 점경물을 형성하게 됩니다. 중류 주택은 한품서용의 중인 계급 이서와 군교를 병칭하는 이교계급이나 지방에 땅을 소유하고 소작인을 두었던 중농인의 주택을 지창합니다. 외부공간의 조영에서 안마당은 옥외의 가사노동 공간으로 반내부공간 성격을 가지며 뒷마당이나 옆마당에는 장독대와 채전을 두고 과실수를 심어 실용성을 강하게 부여하고 있습니다. 사랑마당은 영역성이 있는 공간으로써 담밑에 화오를 만들어 화목을 심고 완상정으로 조영하는 등 서민주택의 소박 단순한 공간구성보다 규모와 용도면에서 확장되고 복합적인 기능의 공간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류주택의 외부공간은 담장 또는 건물에 의해 분리되어 건물의 채를 명칭으로 하는 안마당 사랑마당 행랑마당 사당마당과 건물에 따른 마당의 취지를 명칭으로 사용하는 바깥마당 뒷마당(후정, 후원) 등으로 구분됩니다. 특히 사랑채에 연결된 후정은 뒷산과 연계된 자연원생의 분위기가 가득하고 정자와 연못 샘과 경물이 적절히 배치되어 조영자의 자연관이나 사상이 펼쳐지는 사적영역이자 풍류의 공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주택조경 사례

대표적인 조선시대 주택조경의 사례로는 강릉 선교장, 괴산 김기응 가옥, 논산 윤증 고택, 정읍 김동수 가옥, 구례 운조루, 달성 박황 가옥 등에서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이들은 조선시대 주거공간의 조경적 사례들로서 문화재적 가치를 가지며 원형 보존 상태가 아주 양호하여 국가 혹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강릉 선교장은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위치하며 효령대군 11대손 이내번이 1700년대 중엽에 정거하여 사랑채인 열화당은 순조 15년(1815)에 이후가 활례정은 순조 16년 이근우가 별서인 방해정은 1859년 이의범이 조영하였습니다. 완경사 지형에 위치한 주택의 주건물은 남서향을 취하고 행랑채 사랑채 안채 동별당 서별당 사당으로 구성되며 대문 밖 동남쪽으로는 외별당인 활래정과 방지가 자리하고 보다 멀리 방해정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특히 외부경관 조망에 좋은 입지구조를 보이는 사랑채의 경우 작은 대청은 누마루 형식을 띠고 있으며 행랑채 용마루선 너머로 원경이 앙경으로 차경 되고 사랑마당에는 운치 있는 단풍나무 능소화 등나무가 독특하게 재식 되어 부시를 통한 경관미를 물씬 느낄 수 있습니다. 방해정은 정침공간에서 멀리 떨어진 경포호숫가에 위치하는데 호수와 동해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주변에는 금잔디를 입히고 정자 앞 호숫가에 홍장암이라 부르는 5개의 바위에 ‘이가원주 이근우’라고 글을 새겨 놓았습니다. 괴산 김기응 가옥은 충북 괴산군 칠성면 율원리에 위치하며 이 가옥은 고종조 공조참판을 지낸 김항묵(김기응의 조부)이 1900년 즈음 건립하였습니다. 배후의 낮으막한 성산을 중심으로 개방된 넓은 국을 형성하고 있는 율원리 마을 남쪽 산기슭에 위치한 이 가옥을 중심으로 좌우에 10여 채의 주택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고 전면 도로와 칠성평야가 전개되며 하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형국을 취하고 있습니다. 논산 윤증 고택은 충남 논산군 노성면 교촌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옥녀탄금형의 명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국종 때 소론의 지도자 윤증(1629~1711)이 1676년 정거한 후 주로 후진들의 교육에 진심을 기울였던 곳입니다. 노성산의 숲을 배경으로 노성향교와 나란히 약간 높은 기단 위에 팔작지붕의 사랑채와 행랑채를 정면으로 하여 앞마당에는 지당과 바깥마당 그리고 정갈한 우물이 자리하며 문간에 이르는 길가에 재식 된 많은 수목이 야산의 자연공림과 어우러져 한층 자연스러운 주거공간이 되고 있습니다. 정읍 김동수 가옥은 전북 정급군 산외면 오공리 공동마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가옥은 김동수의 6대조인 김명관(1755~1822)이 1784년 즈음 조영하였습니다. 지리적으로 북쪽에는 상두산 비봉산 지네산이 차례로 마을을 감싸고 남쪽에는 동진강의 지류인 도원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구례 운조루는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이주(1726~1797)가 낙안군수를 지낼 때 명국을 발견하고 지은 것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가옥은 주산인 삼태봉을 배경으로 남동향을 하고 있는데 동쪽의 왕시루봉이 청룡 서쪽의 천왕봉이 백호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앞으로 넓게 펼쳐진 들 가운데로 국도가 가로지르고 멀리 동방천 건너에는 오봉산과 계족산 백운산이 첩첩으로 길게 누워 있습니다. 풍수적으로 ‘금환낙지’의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달성 박황 가옥은 경북 달성군 하빈면 묘동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고택은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인 박광석이 정거하여 1783~1874에 걸쳐 완성하였습니다. 1869년에 안채를 1874년에 별당을 사랑채인 삼가헌은 성수공이 조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건물의 전채적인 향은 동남향으로 살림채와 별당으로 크게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외부 공간은 사랑마당 중문마당 샛마당 안마당 안채와 별당의 후정 지당으로 대별되며 안채에서는 자연수림과 후정의 화계에 담김 경관미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담장과 송림을 배경으로 하여 대나무와 난초를 주제로 한 사군자화를 연상하실 수 있습니다. 하엽정 전면에 연이 도입된 방지가 있으며 별당의 넓은 후정은 채워으로 활용하였으며 서측 담장가에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등 유실수를 심어 실용적 성격을 띠며 지당과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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