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평사 문수원 정원의 역사적배경 고려선원 구성요소

청평사 문수원 정원
청평사 문수원 정원

청평사 문수원 정원의 역사적배경

청평사(淸平寺)는 신흥사(新興寺)의 말사(末寺)이며 춘천을 대표하는 사찰로, 소양호 한쪽에 우뚝 솟아 있는 오봉산(과거 청평산ᆞ경운산) 기슭에 자리했으며 고려 광종 24년에 창건되었으며 세 번의 중창과 조선 명종 때 보우(普雨) 대사가 중건하여 대사찰이 되었습니다. 문수원 정원은 고려 광종 24년 973년 당의 영현선사가 백암선원을 창건한 것을 문종 24년 1069년 강원도 감찰사 이의가 중건하여 보현원이라 개정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선종 6년 1089년(1089년부터 1125년까지 만듬) 아들이며 문신인 진락공 이자현(眞樂公 李資玄, 1061∼1125년)이 문수원 정원을 꾸며 선도장으로 삼아 37년 동안 은둔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자현은 이곳 청평사 문수원에서 베옷을 입고 나물밥을 먹으며 선(禪)을 하며, 평생 수도생활로 일관하다가 청평사에서 생을 마감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청평사에 약 37년간 은둔 생활을 하며 문수원 정원과 8 암자를 만들었고 권세욕과 속세의 탐욕을 다 버리고 평생 마음을 닦았습니다. 문수원 정원은 동서남북 네 구간으로 나뉘어 조성되었으며, 각 구간마다 다양한 시설물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현재는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청평사 남쪽에 남지가 있는데 청평사 뒤편 부용봉이 연못에 투영되어 일명 영지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연못의 형태는 북쪽이 넓고 남쪽이 좁은 사다리꼴 모양이며 연못 안에 자연석이 몇 개 놓여 있습니다.

고려선원에 대하여

선원은 불교 선종(禪宗)의 수행처로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승려들이 참선을 하는 장소입니다. 한국에서는 신라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선종이 유입되면서 9 산선문의 형태로 발전하였습니다. 선종은 불교의 한 종파로서 신라 선덕여왕(632년 ~ 647년) 때 전파되어 신라말기에 널리 유행했으며 고려초에 교종을 누를 만큼 크게 유행되기도 하였습니다. 선을 통하여 각자의 마음속에 자존하는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중요시 여겼습니다. 대표적인 선원으로 바로 강원도 춘천시 오봉산에 위치한 청평사 고려선원인 것입니다. 고려시대에 진락공 이자현이 1089년 입산해 선사상을 바탕으로 구축한 것이며 건축양식과 전통정원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또한, 강화도에 위치한 선원사지는 고려시대에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후, 최우가 자신의 원찰로 창건한 곳으로, 팔만대장경 목판을 조각하여 봉안한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선원은 일반적으로 고요하고 한적한 자연환경 속에 위치하였으며 승려들은 엄격한 규칙과 규율을 지키며 수행을 하였습니다. 고려시대 무신들의 정권장악과 문신들의 현실참여 한계성은 본의 아닌 은둔의 생활을 하게 만들었고 불교는 조계종의 중심에서 선종 중심으로 풍치가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아 대자연 속에 묻혀 선의 정도를 연마하는 것이 유행이 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의 선원은 불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관광객들에게도 인기 있는 명소 중 하나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이런 선장이 많았으나 현존하는 유일한 곳은 바로 이 문수원 정원인 것입니다.

문수원 정원의 구성요소

청평사 문수원 정원은 동서남북 네 구간으로 나뉘어 조성되었으며, 현재는 일부만이 남아 있습니다. 구성폭포 서쪽의 축석, 연못, 석실, 정자터는 중원(中苑), 복희암 연못, 동굴, 좌선대, 수만식(水滿式)은 남원(南苑), 동쪽 작은 계곡의 정자와 소규모 축석한 지역은 동원(東苑), 왼쪽 계곡 위쪽의 해탈문을 지나 적멸보궁까지는 북원(北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정원건축으로는 모정 초당 누대 정사 누각 헌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모정이 가장 많이 역사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상국집 권 23의 ‘진강후모정기’에는 정자의 형태를 “지붕은 뾰족하고 몸체는 둥글어서 마치 킷털로 덮은 듯이 보이는 것이 허공이 높이 휘날린다”라고 기술되어 있으며 목은시집 권 29에는 “석류꽃 피어난 정원 한 구석에 비친 모정에서 한낮에 새로운 차 마시니 마음이 맑은 것이 극락원이 아니런가”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간소하고 정숙하며 상쾌한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장소로 이용되었습니다. 모정은 지붕을 자연재료인 초류를 사용하는 등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며 조화로운 조경시설물이었습니다. 고려 정원의 원지는 수경을 즐기며 더불어 못 속에 섬을 만들어 의미를 부각하는 상징적 형태로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려사’의 한 내용을 보면 “수덕궁 남쪽에 못을 파 관난정을 세우고 의종 20년에는 중미정 남쪽에 연못을 만들어 갈대를 심고 오리를 물 위로 넘나들게 하는 등 일대에 강호의 경치를 이루게 아여 배를 뛰웠다”라고 되어있습니다. 또 고려시대 문헌에 곡지, 곡소, 방지 등이 언급되는데 이 시대에는 네모난 방지형태의 연못과 자연형태의 연못이 있었는데 문수원 정원의 남지와 고려말 경렴정 별서정원의 연못도 바로 이 방지형태의 연못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이곳에는 여러 개의 섬이 만들어져 있는데 영주, 봉래, 방장 삼신산을 표현하고 있으며 진시황의 나지궁의 장지와 한의 무제가 경영한 건장궁원의 신선정원과 같이 불로장생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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